당신은 숨쉬고 있습니까?
신명기 34장 9-12절
마스크로 인해 우리는 쉼쉬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다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투정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충격적인 기사를 하나 접하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거짓말을 고쳐야 한다는 명분 하에 행해진 계모의 학대로 인해, 여행용 가방에 7시간 동안 갇혀 있다가 결국 숨이 막혀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또한, 백인 경찰관의 필요 이상의 진압에 숨이 막혀 사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인해,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우리가 숨쉬기 어려운 시대를 사는 것은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정작 사람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왜 이렇게 숨막히고 가슴 답답한 일들이 일어나며 뭔가 잘 못 되어가고 있을까요?
창세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숨”은 원어로는 “루아흐”라는 히브리 단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성령”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으셨는데, 이는 곧 성령이며, 흙으로 빚어진 사람의 형상이 그 성령의 호흡으로 말미암아 생령이 되었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처음부터 성령으로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새 간혹 “숨 쉬기 힘든 답답한 세상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는 단지 마스크 때문이나, 거리 유지로 인한 사람들 사이의 단절과 같은 문제들 때문만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입니다. 즉, 성령의 호흡을 잃어버리고, 그로 인해, 갈수록 폭력, 욕심, 그리고 이기심과 같은 세상의 풍조에 물들어가는 사람의 문제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호흡이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모세는 자기 자신을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면한다는 것은 말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가까이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장면에 대해,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친밀함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숨에 대해 다루면서, 이 장면을 볼 때, 흙으로 빚으신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 맞대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구약 곳곳에서도 하나님의 임재 (신현현)을 경험한 자들에 대해 소개되어지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대면한 그들이 하나 같이 하나님의 호흡, 곧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할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불어넣으셨고, 이와 동일하게 여호수아에게도 지혜의 영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즉, 성경의 리더들이 능력이 있거나 자격이 있어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이 숨 막히는 세상 속에서 가장 지혜롭게 주어진 소명을 완수하는 믿음의 사람들,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오늘 모세는 자신의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앞서 말한바와 같이, 숨막히는 세상에 동요되어, 똑같이 답답함에 몸부림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호흡, 즉 하나님의 영(루아흐, 성령)으로 살아서, 진리로,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고, 영향을 받기보다 주며, 회복시키는 성도들이 되시겠습니까? 저는 우리 연합교회에 속한 모두가 하나님의 숨결로 사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들을 통해, 우리 가정이라도, 우리 주변의 이웃이라도 숨 막히던 세상에서 숨 쉴 만한 세상으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로마서 8장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피조물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탄식의 원어를 살펴보면, “신음하다, 한숨을 내쉰다. 고통에 부르짖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호흡이 다하고, 마지막 호흡까지 다 끌어 쓰고 난 다음에 나오는 것이 신음이고, 탄식입니다. 즉,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탄식은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호흡을 놓쳐버린 사람들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처참한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호흡이며, 영이신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의 호흡을 놓쳐버린 피조물들, 우리들을 위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탄식하시며, 중보하고 계신다고 기록합니다. 그렇게 중보 하시면서, 탄식하고, 신음하면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우리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성령을 붙드십시오. 그 분과 동행하기를 열망하십시오. 그럴 때에, 우리의 탄식이 하나님의 숨결, 성령의 호흡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의 호흡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거친 생각과 마음이 어루만져지고, 다듬어지며, 이 숨쉬기 힘들 정도로 죄로 물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되어지는 은혜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14살 때에 의료사고로 인해, 자가호흡을 할 수 없게 되고, 평생 기계와 장치의 도움을 받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청년이 있습니다. 근데, 그 청년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숨 쉴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나의 호흡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을 들으면서 이것이 우리 샬롯연합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의 고백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이 들었습니다. 비록, 사업장 매출은 떨어져서 가슴이 답답하고, 팍팍한 현실 앞에 하루 하루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근심이 가득한 나날들이고, 건강의 문제로 고민이 되고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호흡이신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숨쉴만한 세상을 살아가시고, 주님이 주시는 넉넉한 호흡, 남은 호흡으로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고, 감사로, 믿음의 고백으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나와 우리가족 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이 넉넉히 숨쉬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호흡입니다. 할렐루야!